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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통도사 불사리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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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11:27  /   조회92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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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순천대 사학과 교수)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고 수백년이 지난 후 아쇼카왕이 인도 전역에 8만 4천기의 탑을 세워 진신사리(불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 불사리 중 일부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전해졌고, 또 일부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통도사 봉안 불사리의 행방을 찾아보자.

 

불사리의 전래와 행방

 

불사리 신앙은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사찰이 건립되는 초기부터 발전하였다. 사찰의 중심은 탑이고, 탑에 불사리를 봉안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중국에서는 인도로부터 불사리를 모시고자 하는 신앙이 유행하였다. 이는 고구려·백제·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에서는 549년(진흥왕 10)에 각덕覺德이 양나라에서 불사리를 봉송해 오자 왕이 백관과 함께 흥륜사 앞길에 나아가 맞이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최초이다. 그 이후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불사리를 전래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자장정율」조와 「전후소장사리」조에 나온다. 

 

사진 1. 자장율사 진영. 사진 불교문화재연구소.

 

「자장정율」 : 중국 청량산(오대산)에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 자장이 소상 앞에서 기도하니 소상이 감응하여 정수리를 쓰다듬고 범게梵偈를 주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서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아침에 이승異僧이 와서 뜻을 풀이해 주고 … 또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졌다.

 

「전후소장사리」 : 643년(정관 17)에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불두골, 불아佛牙, 불사리 100매와 부처님이 입던 비라금점가사 1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일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 탑에 두고, 일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둔 곳이 상세하지 않다.

 

위의 기록들을 정리하자면 자장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상에 기도하였는데, 문수보살이 꿈에 나타나 범어 게송을 알려주었으나 그 범어 게송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이승異僧이 와서 범어 게송을 해석해주고 또 사리와 가사를 주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승으로부터 받은 사리와 가사를 경주 황룡사 9층탑, 울산 태화사 탑, 양산 통도사 계단戒壇(수계의식을 설행하는 장소) 등에 나누어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불사리와 관련하여 목은 이색(1328~1396)의 「양주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 따르면 1377년(우왕 3)과 1379년(우왕 5)에 왜적이 통도사까지 와서 불사리를 약탈해 가려 하자, 통도사 주지 월송月松이 불사리를 가지고 개경으로 가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득분李得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득분이 임금에게 아뢰자, 태후와 왕비가 개경 송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송림사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송림사를 찾아가서 기원하고 분신사리를 얻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조선이 건국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불교를 독실히 신앙하였으므로 불사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즉위 5년(1396) 2월 22일에 송림사에 봉안되어 있던 불두골·사리·패엽경을 가져오라고 명하고, 도성 안 흥천사에 건립한 사리각에 봉안한다.

 

조선의 사리 857매를 명나라에 바치다

 

그런데 명나라 사신이 칙서를 들고와 불사리를 요구하므로 전국 사찰에 봉안되어 있던 불사리를 수집하여 황제에게 바쳤는데, 이때 통도사 불사리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우선 이와 관련한 1407년 『태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5월 14일> 신하를 나누어 보내서 각도의 사사寺社에서 사리를 구하였으니, 충청도에는 사재소감 한유문을, 경상도에는 전 좌랑 하지혼을, 전라도에는 전 정언 김위민을, 강원도에는 종부부령 이당을 보냈다. 중국 사신으로 황엄 등이 장차 오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유문은 45매를 얻고, 하지혼은 164매를 얻고, 김위민은 155매를 얻고, 이당은 90매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5월 18일> 사례감 태감 황엄과 상보사 상보 기원이 칙서를 받들고 왔다. 칙서에 이르기를, “왕의 아버지(태조 이성계)가 예전에 천보산 등에 있을 적에 사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 태감 황엄 등을 시켜 사리를 맞아오게 하는 바이니, 일일이 찾아서 보내 줄 수 있겠는가? …”

 

<5월 20일> 태상왕(이성계)이 황엄과 기원을 청하여 덕수궁에서 잔치하고, 태상왕이 보배로 소장해 두었던 사리 303매를 내어 황엄에게 주니, 황엄이 매우 기뻐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받았다.

 

<6월 6일> 황엄과 기원 등이 돌아갔는데, 임금이 이들에게 붙여 황제께 아뢰기를, “삼가 신의 아비가 옛날에 간직하고 있던 사리 300매와 신이 간직하고 있던 100매, 그리고 관원을 보내어 지방의 여러 산에 있는 각 절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여 가져온 사리 400매 등 총 800매를 금은으로 도금한 합과 은으로 싼 작은 함 속의 옥합에 가득 채우고, 소금황라복과 채단으로 만들어 수놓은 겹보로 싸서 배신陪臣 이귀령을 보내어 받들고 가게 하되, 흠차관과 함께 가서 

봉진하도록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1407년 5월에 명나라 사신 황엄과 기원이 조선에 소장된 사리를 구해 오라는 칙령(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전국에 신하를 파견하여 사리를 수집한다. 이때 전국에서 수집한 사리는 충청도 45매, 경상도 164매, 전라도 155매, 강원도 90매 등 총 454매였다.

 

명나라 사신들이 돌아갈 때, 태상왕 이성계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사리 303매를 비롯하여, 태종이 소장하고 있던 사리 100(+α)매와 전국에서 수집한 454매 등 총857(+α)매를 명나라 사신에게 보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상왕 이성계는 1396년에 송림사에 봉안되어 있던 통도사 사리를 가져간 바 있다. 그렇다면 이때 과연 명나라 사신에게 보낸 사리 303매에 통도사 사리도 포함되었던 것일까? 명나라 사신 황엄은 1419년(세종 1) 9월에 다시 조선에 와서 사리를 구해 간다.

 

전국에서 수집한 사리 550매를 명에 바치다

 

<9월 1일> 황엄이 부처님과 승려에게 공양하고 (흥천사) 사리각에 들어가서 석탑에 올라 사리를 열어 보고 직접 봉해 두고 돌아왔다. 황엄이 원숙 등에게 사리가 원래 있었던 곳을 물으니,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석가가 세상에 있을 때 치아에서 생겨난 것을 신라 승려 자장이 서역에 가서 문수보살을 뵙고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경상도 통도사에 두었다고 합니다. 병자년(1396)에 우리 태조께서 가져다가 흥천사 사리각에 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9월 2일(2번째 기사)> 상왕(태종)이 이명덕, 원민생, 원숙 등을 시켜 황엄에게 고하기를, “석가 치생사리는 부왕(태조)께서 통도사에서 맞아들여다가 석탑을 세워 안치하였습니다. 부왕이 훙서한 뒤에 영당과 불당을 궁궐 북쪽에 짓고 치생사리를 옮겨 안치한 후 불두골에서 나온 분신사리 4매를 석탑에 바꾸어 안치하였습니다. 어제 들으니 원숙 등이 잘못 알고서 그것을 치생사리라고 하였다 하니 마음이 실로 황공한지라, 불당에 두었던 치생사리와 불두골을 진상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내 마땅히 석탑과 왕부에서 소장하고 있던 사리를 황제께 아뢰고 모두 진상하고자 합니다. 굳이 변명하실 일이 아니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4일이 지난 후에 상왕을 찾아뵙고 사리와 불두골을 친견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9월 2일(3번째 기사)> 임금이 태평관에 거둥하여 사신들과 연회를 베풀고 각각 말 한 필을 선사하였다. 황엄이 취하여 먼저 침방으로 들어가니 왕현이 몰래 사리 4매를 내놓으며, “황엄에게 알리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9월 7일> 이명덕, 원민생, 원숙을 보내어서 황엄을 문소전의 내불당으로 청하여 석가사리 4매와 전국에서 수집한 사리 550매를 내어보이니, 황엄이 볼 때마다 머리 위로 들어 예경하면서 공경함을 극진히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과 승려에게 공양하기를 청하고 사리를 받들어 태평관으로 돌아갔다.

 

<9월 8일> 이명덕, 원숙, 원민생 등이 다시 황엄을 따라 흥천사에 가서 부처님과 승려에게 공양하고 석탑을 열어 석가 정골과 사리 4매를 내어서 받들어 태평관으로 돌아갔다.

 

사진 2. 부처님 치아사리. 사진 건봉사 홈페이지.

 

위의 세종대 기록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태조가 1396년 송림사에서 가져온 것은 불두골·사리·패엽경이었다. 이 가운데 치생사리 4매를 흥천사 사리각에 봉안하였다. 태조가 훙서한 후 흥천사 사리각에 있던 치생사리 4매를 궁궐 북쪽에 불당을 지어 안치하고, 사리각에는 분신사리 4매를 봉안하였다. 

 

1419년 9월 1일 명나라 사신 황엄이 흥천사 사리각의 석탑을 열어 보았는데, 동행했던 조선 신하가 석가의 치생사리라고 하였다. 이튿날(2일)상왕(태종)은 사람을 보내 황엄에게 사리각에 봉안된 사리는 분신사리이므로 궁궐 북쪽에 안치된 불두골과 치생사리를 진상하겠다고 하고 태평관에 가서 연회를 베풀었다. 황엄이 술에 취해 방으로 들어가자 사신으로 함께 온 왕현이 사리 4매를 상왕에게 주며 비밀로 하자고 했다. 이때 왕현이 상왕에게 준 4매의 사리가 어떤 사리인지는 불분명하다. 9월 7일 황엄이 문소전 내불당에서 석가사리 4매와 전국에서 수집한 550매의 사리를 가져 갔다. 또 9월 8일 흥천사 사리각에 있던 불두골과 사리 4매도 가져갔다.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1510년(중종 5) 3월에 있었던 화재로 사리각이 소실되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통도사에 있던 사리 4매와 불두골은 송림사 → 흥천사 사리각 → 궁궐 북쪽 불당에 봉안되었다가 명나라 사신 황엄이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색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비라금점가사와 패엽경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가사에 대해서는 태조가 송림사에서 가져간 목록에서부터 보이지 않고, 패엽경은 태종대 이후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진 3. 통도사 금강계단. 사진 문화재청 홈페이지.

 

명나라 사신이 사리를 가져간 이후 통도사 계단에는 무엇이 안치되었는지 불분명한데, 『세조실록』 9년(1463) 6월 15일 기록에서 “경상도 양산군 통도사 주지 덕관이 군사郡事 나유선과 함께 분신사리를 진상하였다. 의정부에서 보고를 올리며 치하할 것을 요청하니, 임금이 ‘강도와 절도 이외의 죄는 사면해 주어라.’고 하교하였다.”라고 하였으므로, 분신사리를 안치하였다가 세조에게 진상하였던 것 같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통도사 계단의 사리에 관한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임진왜란 이후 통도사의 문헌에는 금강계단의 불사리 기록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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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su5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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