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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불교]
공空이어서 구름이 흘러가고 파도가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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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1:17  /   조회4,38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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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상대론과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 / 공空이어서 구름이 흘러가고 파도가 친다

 

 관측과 오차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물리학이 아주 정확하게 대상을 관측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학교 1학년 이공계 학생은 일반물리학 실험을 수강하며 맨 처음 오차에 대해 배운다. 가장 간단한 예가 12m와 12.0m는 다르다는 것이다. 12m는 이를 11m나 13m와 비교하려는 것이며, 12.0m는 11.9m나 12.1m와 비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12m는 그 길이가 11m나 13m가 아니라는 것이며, 12.0m는 그 길이가 11.9m나 12.1m가 아니라는 것이다. 12m라고 할 때는 이를 11m나 13m와 비교하기 때문에 1m 미만의 길이를 측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달리, 12.0m라고 할 때는 이를 11.9m나 12.1m와 비교해야 하므로 0.1m의 길이를 측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12m는 길이가 11.5m 이상 12.5m 미만이라는 것이고, 12.0m는 길이가 11.95m 이상 12.05m 미만이라는 것이다.

 

 측정 장치에는 고유의 측정 한계가 존재하므로,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측정 장치에 따라 정확도가 다른 기술을 해야 한다. 측정 장치의 한계로 인한 오차를 고려하지 않으면 측정치는 이미 그 자체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1mm의 눈금자로 길이를 재면서 12.34mm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틀린 진술이다. 측정 장치의 한계 때문에 오차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확도의 한계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물리학의 정확성이 오차 범위 안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파악은 대상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대상의 드러남은 관측자의 역량에 의해 제한된다.

 

 달리는 기차 안의 찻잔

 

 이제 관측 장치의 정확도나 관측자의 역량과 무관하게 관측치가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여기엔 두 사람의 관측자가 등장한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차를 마신다고 하자. 찻잔의 속도는 얼마인가?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차 밖에 있는 사람이 볼 때, 찻잔은 기차와 함께 시속 100km로 달려간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사람에겐 찻잔이 정지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차를 마실 수 없다. 두 사람이 한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말을 한다. 누가 맞는가?

 

 기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찻잔이 100km로 날아간다면, 찻잔은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가 된다. 차를 마시려면 정지해 있어야 한다. 기차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찻잔이 정지해 있다면, 이는 기차가 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찻잔은 시속 100km로 달려가야 한다. 그러면 어느 것이 맞는가? 정지와 운동이라는 서로 배타적인 두 진술을 조건 없이 모두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두 진술을 옹호하려는 오류다. 이와 달리 정지와 운동 중의 어느 하나를 고집할 수도 없다. 어느 것을 택하든, 부정할 수 없는 다른 상황을 무시하는 오류다.

 

 갈릴레이의 상대론: 뉴턴역학의 관점

 

 이 문제를 뉴턴역학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뉴턴역학에서 속도란 관측자와 관측 대상 사이의 상대속도다. 기차 안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들고 있는 찻잔이 정지해 있고, 기차 밖에서 이를 보는 사람에게는 찻잔이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그러므로 찻잔의 속도가 얼마냐는 것은 물음 차제가 잘못이다. 누가 보느냐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뉴턴역학에서 속도는 관측자와 관측 대상이 어떤 관계의 맥락을 맺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게 갈릴레이의 상대론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Justus Sustermans가 그린 갈릴레이 초상화)

 

 

 이제 2차원 운동을 생각해 보자. 갈릴레이는 포물선운동parabolic motion을 두 좌표의 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배 위에서 공을 위로 던진다고 하자. 배에 탄 사람에게는 공이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수직 운동을 한다. 그러나 해안가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이 포물선운동을 한다. 배의 속도가 공의 수직 운동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배의 수평 운동과 배에 탄 사람이 보는 공의 수직 운동이 합쳐진 것이 해안가에서 보게 되는 공의 포물선운동이다. 이 포물선운동은 수직운동과 수평운동으로 나누어질 수도 있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다. 이 두 사람은 공의 운동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다. 공 자체는 직선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포물선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운동을 하는지는 이 공을 누가 관측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체의 운동은 관측 대상과 관측자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틀에 의해 결정된다.

 

 지구의 공전

 

 기차 안의 찻잔이나 배 위의 공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앞에서 논의한 것과 같은 상황이 지구상의 우리 모두에게 항상 일어난다. 태양에서 1억 5천만km 정도 떨어져 있는 지구는 1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1년 동안 9억km의 거리를 달려야 하므로, 지구의 공전 속도는 초속 30km에 이른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5초면 갈 수 있는 엄청난 속력이다.

 

 그럼 내 앞에 놓인 모니터의 속도는 얼마인가. 내가 보기에는 정지해 있지만, 지구 밖에서 본다면 초속 30km로 날아간다. 지상의 모든 물체가 우리와 같은 속도로 우주 공간을 달리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의 물체가 정지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지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으므로 그렇다고 확신할 뿐이다. (달도 지구와 함께 움직이므로, 달 탐사 우주인마저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지구를 벗어나지 못했다). 모니터 자체는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관계의 맥락에 의해 우리에게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엄청난 속력으로 달리는 지구 위에서 공을 위로 던지면, 이는 배 위에서 공을 던지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상황이 된다. 지구와 함께 여행하는 우리에게는 공이 수직 운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언제나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지구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은 수직 운동을 한 적이 없다. 수직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우주의 운동

 

 그러면 내 앞의 모니터는 초속 30km로 날아가는 건가? 아니다. 태양이 고정돼 있고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태양은 우리은하(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초속 230km의 속력으로 공전한다.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안드로메다은하는 우리와 초속 90km의 상대속도로 움직인다.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를 포함하는 은하의 모임은 버고은하단에 끌려가고, 버고은하단은 버고초은하단에 끌려가고, 버고초은하단은 다시 코마초은하단에 끌려간다. 이 큰 집단도 겨우 우리 주변의 우주일 뿐이지만, 벌써 속력을 나타내는 숫자는 의미를 상실한다. 오직 상대속도만 남는다.

 

 우리가 말하는 속도는 어떤 기준점에 대한 속도다. 그런데 우리 우주에서 그런 기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 고정된 것이 없이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이 우주 속에서 속도라는 것은 없다. 같이 움직일 뿐이다. 정지한 것도 아니고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정지한 적도 없고 정해진 속도로 움직인 적도 없다. 속도라는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나와 대상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연기緣起하고 있을 뿐, 이것 말고는 다른 무엇이 없다.

 

 연기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

 

 우리는 먼 산의 나뭇가지에 앉은 매미를 볼 수 없다. 광학 이론에 의하면, 안구의 크기가 더 커지면 매미를 볼 수 있다. 현재 크기의 안구로 먼 산의 매미를 보려는 것은 1mm의 눈금자로 0.01mm를 재려는 것과 같다. 먼 곳을 관찰하려면 망원경을 써야 한다. 더 먼 곳의 천체를 관측하려면 전파망원경의 크기를 더 늘려야 한다. 어떤 관측 장치를 사용하더라도 세계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만 있다. 세계는 연기緣起에 의해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상대속도나 상대론에서‘상대’란 관측치가 관측 대상 고유의 물리량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보는 것은 찻잔의 속도가 아니다. 나에게‘나타나는 속도’일 뿐이다.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찻잔의 속도라는 실체는 원래 없다. 실체가 없지만 나에겐 찻잔의 속도가 나타난다. 세계는 연기緣起에 의해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연기緣起하므로 공空이지만, 우주가 낱낱이 모두 드러난다. 연기의 기적이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선언하셨고, 성철 스님이 강조하신 중도中道다. 공空이지만, 공空의 바로 그 자리에서 구름이 흘러가고 파도가 친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중도中道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중도中道다. 공空이 아니면, 구름이 흘러가지 못하고 파도가 치지 못한다. 참으로 공空이어서 구름이 흘러가고 파도가 친다. 지안 스님이 강설하신 『대승기신론』의 한 구절로 글을 맺는다.

 

“세상의 모든 경계가 모두 중생의 무명으로 인한 허망한 마음에 의해 머문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거울 속의 영상과 같아서 실체를 찾을 수 없다. 오직 마음에 의해 생긴 허망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마음이 생기면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없어지면 가지가지 법도 없어진다[心滅則種種法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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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고려대학교 과학기술대학 물리학과 교수. 연구 분야는 양자정보이론. (사)한국불교발전연구원장.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 (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양형진의 과학으로 세상보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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