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자취를 찾아서’ 기획연재를 끝냈다. 스님이 머물던 도량 25곳을 찾아갔다 와서 33회에 걸쳐 게재했다. 이제 다시 그 연재를 생각하니 ‘그래도 해냈구나’하는 마음이다.
처음 기획연재 소식을 듣고 그 필자가 되어달라는 제의가 왔을 때 언뜻 “그러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성철스님의 위대한 자취를 내 깜냥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6년 동안 출가수행자로서 살았기에 스님을 글로써 드러내는데 객관적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있어 스스로 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나의 그런 경력이 오히려 필자로서의 장점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몇 날을 고심하다 결국 글을 쓰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러겠다”고 불교신문사에 통보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필자수락을 하도록 마음먹는데 큰 힘이 된 것이 있다. 불교신문사와 백련불교문화재단이 공동기획으로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1년 4분기로 나누어 분기별로 일정 주제로 세미나를 갖게 한 것이다.
그 세미나를 통해 성철스님의 사상과 수행정신, 저술, 불교계에 끼친 영향 등을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집중 조명하는 기획이 진행 중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큰 다행으로 여기고 ‘내가 할 일은 스님의 주석도량 순례에만 마음 쓸 일’이라고 생각, 큰 짐을 덜어낸 기분이었다.
스님의 주석도량 순례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했다. 언젠가는 나 개인의 수행삼아 스님이 머물던 도량을 탐방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런 제의가 왔기에 며칠 생각을 거듭하고서야 스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좇기로 한 것이다.
순례를 일단락 짓고 나니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마냥 아쉬운 마음도 많다. ‘좀 더 생각할 걸’ ‘좀 더 살피고 올 걸’ ‘좀 더 많은 분의 의견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하는 생각을 지금도 떨칠 수 없다.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큰 것은 나 스스로 성철스님을, 나의 은사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뜻을 헤아리고 그 말씀을 새겼으면 하는 것이었다.
‘못난 자식은 부모를 모르고, 못난 제자는 스승을 욕되게 한다’는 말이 곱씹혀졌다. 자식이 못나면 부모의 잘남을 드러내지 못하고 제자가 못나면 위대한 스승을 앞세워 제 잘 살기를 꾀한다는 말이 새삼스레 가슴을 아프게 했다.
회한(懷恨)은 언제나 있는 법이고 부모와 스승의 은혜를 바다의 물 한 방울만큼이라도 알게될 쯤에는 그때서야 세월은 후딱 지나고 나이는 들어 겨우 철이 났다는 소리를 듣는구나 싶다. 하늘만큼 높고 바다처럼 너른 은혜를 우리는 모르고 산다. 너무 크고 너무나도 넓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진기자 김형주 차장과 함께 다녀온 성철스님 주석도량은 모두 25곳. 두 번씩 다녀온 곳을 포함해 1년6개월 동안 33회 걸쳐 연재됐다. 사진 위 왼쪽부터 스님이 가장 오랜 주석처 해인총림 해인사의 일주문, 산청의 생가 터에 지은 겁외사, 오도송을 읊었던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전경, ‘봉암사 결사’ 도량 문경 봉암사. 대학불교학생회 등 일반인과 출가 대중을 위해 처음으로 법석을 연 문경 김용사(사진 아래 왼쪽), 철조망을 치고 용맹정진했던 파계사 성전암(가운데), 입적 때까지 머물렀던 해인사 백련암.
스님의 주석도량 순례를 하면서 다시금 그 크고 너른 은혜를 생각했다. 사람은 거의가 100년도 채 못산다. 그 세월동안 어떤 사람은 위대한 자취를 남기고 어떤 사람은 왔다간 흔적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는다. 한 평생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그 사람의 일생을 알게 함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스님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필자가 느낀 것이 있다면 ‘길’이란 말의 의미라고 하겠다. 길은 둘이 있다. 하나는 일반 사람이 만든 교통의 편리를 위한 길이요 다른 하나는 위대한 스승이 만든 ‘사람이 사람답게 가야 할 길’이었다.
필자는 교통편의를 위한 길에서 사람의 길을 생각하며 순례했다. 교통 길은 편리해야 했고 사람 되는 길, 구도의 길은 험난해야 했다. 편리를 좇으면 도심(道心))은 옅어지고 도심을 좇으려면 편리를 버려야 했다. 세월이 흐르고 시절이 바뀌어도 이 이치는 진리라 하겠다.
스님이 머물던 곳은 첩첩산중이었다. 세월 따라 그 절, 그 암자로 가는 교통의 길은 잘 만들어져 있었다. 필자는 승용차로 그 절, 그 암자 앞마당까지 후딱 갔다. 그러고서 생각하곤 했다. “이 길을 이렇게 오는 게 아닌데…”하는 생각이었다.
반세기 전 스님이 가신 길을 생각했다. 북통만한 걸망을 지고 들길 산길을 헐떡이며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터벅터벅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걸어서 갔던 그 길. 가다가 배고프면 빌어 먹고 가다가 다리 아프면 논둑, 바위틈에서 다리 쭉 뻗고 등 기대어 한 숨 돌려 쉬어가고 가다 쉬었지 않았던가.
지금 나처럼 참으로 편리한 교통로로 휙 하니 후딱 가서 휘익 한번 둘러보고 “그럼 됐다, 도로 가자”하는 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순례이지 않은가. 문자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 말 타고 달리면서 산을 보는 격이지 않은가. 그러고서 어떻게 큰 스승의 깊고 넓음을 헤아리려 하는가. 진정 어리석음이 아닌가.
요즘말로 하자. “순례 길은 제 발로 걸어서 해야 한다. 승용차로는 안 될 일이다. 발로 걸어야 두뇌의 생각도 활발해진다. 발로 걸으면서 주변 산천을 둘러보아야 사색(思索)도 깊어진다. 다리 아픔을 겪고 이겨내야 머릿속의 잡념도 혼탁함도 깨끗이 씻겨나간다.”
“흥! 자기는 편리를 좇았으면서 남들 보고는 그러지 말라고?” 당연히 할 말이고 당연히 내가 들어야 할 말이다. 순례를 마무리 하고 이 글을 쓰면서 혼자 조용히 생각한 말을 하고 싶다.
지금 우리는 오늘 여기서 성철스님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그 어른을 얼마나 알려고 하고 그 어른의 말씀과 가르침을 얼마나 이해하고 실천하려 하는가. 한편으로 “그 성철스님 이야기 이젠 좀 그만하지. 웬만큼 했으면 됐을 법도 하잖아?”하는 사람은 없는지를 헤아려 본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성철스님의 위대성은 스님의 말대로 ‘부처님 법대로’ 살았던데 있다고. 부처님 법이 아니면 말씀하지 않은 분이 성철스님이다. 불자는 부처님 법대로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부처님을 믿고 이해하고 그 법과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성철스님은 부처님 법을 스스로 깨치고 자신의 삶을 부처님법대로 살았고 모든 불자 나아가 온 사람들에게 부처님법대로 살 것을 일러주었다. 그래서 스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은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요 스님의 삶을 현창하는 일은 불교를 드높이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기에 스님 태어나신지 100년을 기리는 것이 아닌가.
필자 이진두 논설위원.
성철스님 주석도량 (그동안 다녀온 곳)
1. 경남 산청 겁외사
2. 경남 산청 대원사
3.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4. 부산 금정산 범어사 내원암
5.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 백련암
6. 경북 영천 은해사 운부암
7.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8.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
9. 충남 예산 수덕사 정혜사 능인선원
10. 충남 서산 간월도 간월암
11.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
12. 경북 선산 도리사 태조선원
13. 경북 문경 대승사 대승선원
14. 경북 문경 대승사 대승선원
15. 경북 문경 대승사 묘적암
16.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
17.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
18, 부산 기장 월내 묘관음사
19. 경남 고성 문수암
20.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
21. 경남 창원 불모산 성주사
22. 경남 창원 불모산 성주사
23.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
24.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
25. 서울 삼각산 도선사
26. 서울 삼각산 도선사
27. 경북 문경 운달산 김용사
28. 경북 문경 운달산 김용사
29.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
30.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
31. 부산 해운대 청사포 해월정사
32. 부산 중구 고심정사
33. 경남 합천 해인총림 해인사

■ 새 연재 ‘성철스님과 나의 법연(法緣)을 말하다’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기획연재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를 끝냅니다. 그 기획의 연장으로 8월부터 ‘성철스님과 나의 법연(法緣)을 말하다’란 제목으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성철스님과 법연을 맺은 스님들을 찾아뵙고 그 스님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철스님의 법향(法香)을 느끼려는 취지입니다.
[불교신문 2834호/ 7월21일자]